일상/궁금증

유럽에는 왜 대만 대사관이 없을까

빵필 2022. 2. 17.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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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한 중국은 공식적으로 리투아니아에서 영사업무를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해 21년말, 리투아니아는 유럽 최초로 대만 대사관 개설하여 중국과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겼다.

중국대비 인구 50분의 1정도밖에 되지않는 유럽변방의 소국이 이러한 발언을 한 배경은 무엇일까?

그리고 영토는 작지만 반도체 강국인 대만의 대사관이 유럽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통한 중국이 대만으로 인정받던 시절  
중화민국(대만) 국기

1940년대 중반, 중국 내부의 권력다툼에서 국민당은 공산당에 패하여 본거지를 바다건너에 위치한 타이페이로 옮기며 대만의 역사는 시작된다.

장제스의 중화민국은 영토와 인구수가 크게 줄었지만 그간 국제사회에서 정통한 중국이라는 인식덕분에 중국의 대표로 UN에 가입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대만은 중국의 침략을 늘 경계했으며 1949년 10월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천명함과 동시에 대만을 수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때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미국은 한반도에 병력을 파병함은 물론 중국의 대만침략을 대비해 대규모 함대를 배치하여 추가적인 전쟁을 막게 된다.

커져가는 중국에 정통성을 빼앗기다.
UN총회에서 대만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자 기뻐하는 중국대표단


대만입장에서는 한숨 돌리게 되었지만 중국이 점점 성장해가자 대만과 중국, 두 나라 중 중국을 선택하는 국가가 늘어나게 되고 1964년에는 프랑스가 대만과 단교하고 중국과 수교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1971년 10월에 열린 UN 총회에서 중국의 합법적 권리 회복에 관한 투표가 진행되고 중국이 대만이 가지고 있던 모든 권리를 계승받게 된다.

이어지는 단교로 난처해진 대만
중국과 대만의 수교국 추이

이후 대만과 세계 각국의 단교는 급속도로 진행되었다.
일본은 1972년, 미국은 1979년에 대만과 단교했으며 주요국가 중 대한민국만이 꽤 오랜기간 관계를 유지하다 1992년 9월 23일 단교 후 한국 내 대만 대사관의 대사관 열쇠를 돌려받게 된다.

대만대사관의 마지막 모습

한국을 향한 대만의 분노와 배신감은 대단했다.
일부지역에서는 태극기를 불태우고 불매운동까지 이루어졌다.
일제시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자금을 지원해주고 한국전쟁 당시 심리전 요원을 파견해 한국을 지원하기도 했던 대만이기에 나름대로 기대했던 부분이 있었을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한국도 과거의 역사를 기억하기에 충분한 시간을 버티고 버틴 끝에 내린 결정이 아니었을까싶다.

대만의 현재와 미래
대만의 수교국


이러한 이유로 대만의 수교국은 남태평양의 팔라우, 마셜제도 등 전세계를 통틀어 15개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리투아니아에 유럽 최초의 대사관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다.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있는 중국의 행태. 그리고 코로나 19 이후 급격하게 격앙되고 있는 반중정서와 미중 대립을 전략적으로 이용할 기회가 온 대만.
패권을 향한 미중 양국의 경쟁과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는 국제사회의 복잡성이 작지만 강한 반도체 국가 대만에게 득과 실 어느 것으로 작용될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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